스톡홀름 증후군 – 정신의 자유를 포기한 ‘음울한 초상’ 1974년 2월 4일 당시 19세의 패트리샤 허스트(Patricia Hearst)는 연인과 은밀한 시간을 즐기던 중 소총으로 무장한 좌익 과격파 상생해방군(Symbionese Liberation Army)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사흘 뒤 허스트 씨를 납치한 공생해방군은 거액의 몸값을 요구했지만 허스트 씨 가족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두 달 뒤인 4월 15일 상생해방군은 샌프란시스코의 한 은행을 습격해 현금과 귀중품 등을 훔쳤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허스트의 무사귀환에 매달렸던 가족과 FBI 수사관들은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은행 CCTV에 찍힌 영상에서 허스트 씨는 소총을 들고 은행 직원과 고객을 당당히 협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점점 믿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한 달 뒤인 5월 FBI가 이들의 근거지를 급습해 6명의 상생해방군단원을 사살하자 도주한 허스트는 타냐라고 이름 붙이고 자신은 조직의 충성스러운 동지가 돼 부모와 기성 사회를 공격한다는 내용의 카세트 테이프를 보내왔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자신의 딸의 성격이 완전히 바뀐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납치 사건이 일어난 지 거의 1년 반이 지난 후 FBI와의 총격전 끝에 마침내 허스트는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재판이 시작되자 허스트는 다시 태도를 180도 바꿨고 자신은 협박을 받았을 뿐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협력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변호인단은 또 그녀가 유괴범에게 세뇌당했고 이는 스톡홀름 증후군 현상에 해당한다며 무죄를 항변했습니다. 이런 억지 주장에 속지 않은 배심원들은 징역 35년을 선고했지만 아버지의 뒷바라지 덕분인지 징역생활을 한 지 2년도 안 돼 가석방됐습니다. 허스트는 이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책도 쓰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패트리샤 허스트는 비슷한 경험을 한 적지 않은 피해자 중 남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언론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의 손녀이자 백만장자의 상속녀라는 점이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유능한 변호인단의 훌륭한 변호를 받을 수도 없었을 것이고, 카터 대통령의 가석방 허가를 받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지나치다고 생각할 정도의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언론 재벌가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온 현대판 신데렐라에게 열아홉이라는 꽃다운 나이, 심지어 소총을 들고 부모를 비롯한 기성세대에게 난폭한 욕을 하는 동영상까지입니다. 당시 미국인을 비롯한 전 세계 기성세대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허스트는 왜 자신을 유괴한 좌익 단체에 동조했을까요? 허스트 본인은 끝까지 말을 아꼈지만 성적 학대 및 물리적 협박, 세뇌, 약물, 최면 등 다양한 설명이 제시됐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한 것은 바로 전년도에 있었던 스톡홀름 은행 강도 사건과의 유사성이었습니다.
1973년 8월 스톡홀름의 신용은행에서는 6일간의 인질극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다 인질들은 묘하게 인질범과 정서적으로 밀착되는 현상을 보였고 인질범이 체포된 뒤 오히려 그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인질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TV로 생중계됐고 범죄심리학자 닐스 베니젤로트(Nils Bejerot)는 수사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TV 생중계로 해설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인질들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에 대해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syndrome)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드물지 않지만 일반 대중이 상상하는 것만큼 흔한 것은 아닙니다. 정신분석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 현상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인질이 된 사람은 살아 죽는 것을 비롯해 식사, 배설 등 모든 것을 인질범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아기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기 때는 싫든 나쁘든 엄마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로서는 상상 밖이라고 생각하지만 아기는 엄마를 유혹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쓴다고 합니다. 눈을 맞추고, 함께 웃거나, 또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울고 엄마가 나타나면 바로 울음을 그치는 등의 행동은 어떻게든 엄마의 마음에 들어 사랑받으려는 아기들의 지능적인 전략입니다.
인질범에게 납치되는 상황이 되면 급격히 정신적인 퇴행이 일어나고 인질들은 아기 때 했던 방어수단을 동원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모멸감을 참으면서 무리하게 만드는 의식적인 행동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신체적, 정신적 압박이나 외부로부터의 고립 등 극단적인 심리 상황 속에서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자기 최면에 빠지는 것입니다. 적어도 정신 분석가들은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스톡홀름 증후군은 손꼽힐 정도인데, 거의 같은 심리학적 메커니즘을 거쳐 일어나는 현상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모나 남편에게 학대받는 아이들이나 여성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끊임없는 학대에 시달리지만 동시에 경제적, 심리적인 면에서 가해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맞으면서도 자신과 세상에서 유일한 연결고리인 아버지 또는 어머니에게 더 매달리게 됩니다. 때리는 부모도 아닌 것보다 낫죠. 남편이나 남자친구에게 협박, 학대를 당하는 여성들도 자신들이 이렇게 얻어맞는 것은 단지 자신들의 부족 때문이라고 자위하며 오히려 더 가해자에게 굴종하고 충성을 다합니다.
신체적 구속보다 정신적 구속이 더 잔인하고 파괴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쉽게 정신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해요. 가짜 종교에 빠져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고, 다단계 업체의 선전에 뛰어들어 열성적인 선전원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무한경쟁 자본주의에 세뇌돼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지금의 우리의 모습도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져 정신의 자유를 포기한 음울한 초상 아닐까요.
가혹한 신체적 고통 속에서도 마음으로는 자유를 누리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적에 동조하여 오히려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몸과 마음을 통째로 적에게 넘기는 사람이 있습니다.